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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시인의 말

시인의 말

 

 시(詩)는, 시의 집은, 내가 유일하게 숨어 있을 만한 곳이었다. 어릴 때 키 큰 담배건조실에서 불을 때며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이야기 속에서 시작된 말의 씨앗들은 타닥타닥 지금도 내 안에서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되어 내 집을 지켜주는 온기가 되고 있다.

 나는 그 안에서 혼자 놀았다. 쓸쓸하지 않았다. 재미있다, 재미있다고 자꾸만 말하면 눈물나게 쓸쓸해지는 그런 재미있음이었지만 그래도 잘 놀았다. 사방의 벽은 오래될수록 편안해졌으며, 하나둘씩 내 흔적들이 쌓이면서 비가 오면 흙냄새 비냄새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고, 햇살이 지나면 햇살이 닿았던 공간이 오래도록 따뜻함을 알았다.

 아무도 모르지만 바람이 기억하는 집. 계단을 오르고, 다양한 모양의 창들이 일렬로 늘어선 복도를 지나면서 어느날은 울었다. 이 집은 거짓말처럼 한번도 날 거부하거나 밀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이보다 착한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이 모두 시이고, 집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 집집마다 밤이면 달을 달아주고 싶다. 그리하여 이제 그대들이 내가 만든 집에 물방울이 되어 창문에 맺히거나, 창문이 되어, 하늘이 되어, 바람이 되어 나를 읽거나 혹은 벽이 되어 나를 가로막아설지라도 둥근 밥상에 앉아 따뜻한 밥 한끼 나누며 이 세상 착한 것들의 이름을, 그 죄 없음에 대하여 함께 말하고 싶다.

 

2006년 1월 연신내에서

이승희

 

창비, 이승희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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