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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박준 숲 박 준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 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고요 대신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 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그해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더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은 것입니다 머지 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벤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 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
이별의 풍경, 그 기록 식후에 이별하다,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눈을 감고, 박준 눈을 감고, 박준 눈을 감고 앓다 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驛)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꿈꾸지 않으면 꿈꾸지 않으면 양희창 작사, 장혜선 작곡 꿈꾸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별헤는 마음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것 가르친다는 건(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는 알고있네 우리는 알고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 자꾸자꾸 생각나는 노래
시인의 말 ■ 시인의 말 시(詩)는, 시의 집은, 내가 유일하게 숨어 있을 만한 곳이었다. 어릴 때 키 큰 담배건조실에서 불을 때며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이야기 속에서 시작된 말의 씨앗들은 타닥타닥 지금도 내 안에서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되어 내 집을 지켜주는 온기가 되고 있다. 나는 그 안에서 혼자 놀았다. 쓸쓸하지 않았다. 재미있다, 재미있다고 자꾸만 말하면 눈물나게 쓸쓸해지는 그런 재미있음이었지만 그래도 잘 놀았다. 사방의 벽은 오래될수록 편안해졌으며, 하나둘씩 내 흔적들이 쌓이면서 비가 오면 흙냄새 비냄새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고, 햇살이 지나면 햇살이 닿았던 공간이 오래도록 따뜻함을 알았다. 아무도 모르지만 바람이 기억하는 집. 계단을 오르고, 다양한 모양의 창들이 일렬로 늘어선 복도를 지나면서 어느날은 울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조 은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때론 화를 내며 때론 화도 내지 못하며 무엇인가를 한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 목이 멜 것이다 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 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 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는 상한 마음을 곱씹느라 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 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그녀는 오래 울었다 건강한 슬픔 /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당신 너무 힘들었지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시리즈 중 '시인 신달자' 편에서 발췌(전문 출처 http://bookshelf.naver.com/story/view.nhn?intlct_no=89) 미국의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라는 사람이 있죠. 그 사람의 묘비명에 ‘남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이, 여기 잠들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남편이 아플 때 병원에 꽂혀 있는 책 중에 앤드류 카네기의 자서전이 있었어요. 우연히 그 책을 서서 뒤적여 보고 있었는데, 거기에 ‘내가 일생 가장 많이 한 말은 딱 한마디, 이 말이다. 당신 오늘 너무 힘들었지요?’ 이런 말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때 인생에 막 화가 나있고, 모든 게 원망스럽고. 포기하고 싶고, 세상 사람이 다 밉고 그럴 때에요. ‘왜 나만 이래야 돼’ 그런 게 온 몸에 가시처럼 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