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밑줄

(45)
어디든 가서 (늘 그렇게 불렀던 건 아니였지만) 누구는 특수부대라고, 또 다른 누구는 감옥이라고 부르던 첫 직장에는 만화에 나오는 예쁜 소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좀 나이 든 언니가 있었는데, 그 '특수훈련'이, 혹은 '수감생활'이 힘들 때 그 언니는 "누구 내 손 좀 잡아줘" 라는 특이한 부탁을 했었다. 내가 옆자리에 있을때 몇 번 잡아주기도 했던 그 손, 그 말이 아주 가끔 생각난다. 내 삶이 가난했을 때(물리적인 가난함이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그게 누가됐든 그 누군가의 바짓가랑이라도, 그 누군가의 치맛단이라도 붙잡고 늘어지고 싶었던 때. 그런 때. 특이하였다기보다, 절박하였는지도.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문효치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젓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
실내악 외출 '이브나' 잠든 너의 전화벨이 울릴 때 난 괜히 몇 번 내버려 둬 난 괜히 몇 번 내버려 둬 식은 커피 같은 나의 고백에 몇 차례 버스를 보낸 뒤 넌 내게 이렇게 말했지 "난 절대 결단코 수백 날이 지나도 너 밖에 모르는 바보는 안 될 거야 행복함에 눈물 범벅이 될 지라도 너 하나로 숨 막힐 바보는 안 될 거야 그렇겐 안 될 거야" 정답지도 살갑지도 않던 눈동자 그 까만 색이 난 못내 좋았는지도 몰라 넌 절대 결단코 수백 날이 지나도 나 밖에 모르는 바보는 안 될 거야 유채꽃 금목서 활짝 핀 하늘 아래 나 하나로 듬뿍한 바보는 안 될 거야 그렇겐 안 될 거야 늦은 봄 눈 같은 나의 고백도 꽃 노래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어
그 또한 내 삶인데 그 또한 내 삶인데 / 조용필 작은 창에 기댄 노을이 남기고 간 짙은 고독이 벌써 내 곁에 다가와 더없이 외로워져 보이는 건 어둠이 깔린 작은 하늘뿐이지만 내게 열려있는 것 같아 다시 날 꿈꾸게 해 손 내밀면 닿을듯한 추억이 그림자 되어 지친 내 마음 위로해주고 다시 나를 살아가게 해 계절따라 피어나는 꽃으로 세월을 느끼고 다시 고독이 찾아와도 그 또한 내 삶인데 더는 사랑이 없다해도 남겨진 내 삶인데 가야할 내 길인데 그것이 내 삶인데
75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75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 이성복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 지성,2003)
쓸쓸한 날에 쓸쓸한 날에 /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한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알려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
유효한 나의 집 사는 기쁨 / 황동규 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는 바램이 있다. 40년 가까이 아파트만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나의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거니 생각했다. 마지막 디딤돌에서 발을 떼면 마련한 집의 담을 헐고 마당 절반엔 꽃을 심자. 야생화 밟지 마라 표지 세워논 현충원 산책길엔 도통 없는 노루귀 돌단풍 은방울꽃 그래, 몰운대에서 눈 크게 뜨고 만난 은방울꽃 카잔차키스 묘소에 열심히 살고 있던 부겐벨리아 루비보다 더 예쁜 루비들을 키우는 노박덩굴을 심자. 겨자씨 비유의 어머니 겨자도 찾아 심자. 나머지 반은 심지 않아도 제물에 이사 와 자리 잡는 풀과 민박 왔다 눌러앉는 이름 모를 꽃들에게 내주자. 개미와 메뚜기 그리고 호기심 많은 새들이 들르고 벌레들도 섞여 살겠지. 그래, 느낌 서로 주고받을..
요즘 뭐하세요? 요즘 뭐하세요? / 문정희 누구나 다니는 길을 다니고 부자들보다 더 많이 돈을 생각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데 살아 있지 않아요 헌옷을 입고 몸만 끌고 다닙니다 화를 내며 생을 소모하고 있답니다 몇 가지 물건을 갖추기 위해 실은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어요 충혈된 눈알로 터무니없이 좌우를 살피며 가도 가도 아는 길을 가고 있어요
어떤 환영사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황지우 시인의 2007년 신입생 환영사] 내가 시에 처음 ‘눈 떴던’ 때라고 할까요, 파블로 네루다식으로 표현해서 “시가 나를 찾아왔을 때”가 중3 때였던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방학 때 시골 친구집 가서 곁눈으로 힐끗 보았던 친구 누나가 무지무지 보고 싶어지고, 사타구니에서 이상한 털이 나기 시작하면서 생의 비린내를 느꼈다고 할까요, 어느 날 갑자기 산다는게 시시하게 느껴지고, 가을날의 신작로 앞에서 어디론가 멀리 훌쩍 떠나버리고 싶던 이른바 사춘기 징후 속에서 문학이라는 열병에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 김소월의 ‘초혼’이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독’이라는 시를 접하고는 그만 내 가슴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자주 가슴이 무너져내렸는데,..